시조 인단(仁段)의 자(字)는 자석(子石)이시니 계고집성(稽古集成)을 참고해 보면 중국지방인 정(鄭)나라 목공(穆公)의 증손이요, 자인(子印)의 손자요, 자장(子張)의 아들이니 정나라 목자(穆字)존칭을 가진 일곱분 중의 한분이시다. 시조 인단에서 그 조부의 이름 자인(子印)의 인자(印字)를 따서 성씨를 하시니 이로써 인성(印姓)이 되게 되었다. ○노(魯)나라 양공(襄公)二十七年 을묘에 인단께서 정나라 간공형(簡公 이름 亨)과 조무(趙武)와 함에 실솔부(蟋蟀賦)를 지었는데 조맹(趙孟)이 말하기를『훌륭하도다. 능히 국가를 보존할 임자가 되겠다』고 칭찬하였고 또 참고해 보건대 노양공(襄公)三十년은 즉 정나라 간공(簡公)二十三년인데 공손흑(公孫黑)의 난리를 만나매, 정나라 자산(子産)이 나가서 싸우려 하매 인단(字는 子石)이 의(義)를 지켜서 따르려 하다가 정나라대부(大夫 : 즉 벼슬이름) 한호(罕虎)가 만류하여 본국으로 돌아왔다. 이 자산(子産)과 인단(字는 子石)의 사적이 또한 좌씨전(左氏傳 : 魯史) 제七권에 더욱 자세히 실려 있다. 또 참고하건대 좌씨전에 있기를 노나라 양공(襄公)三十一년 기미는 즉 정나라 간공(簡公)二十四년인데 위나라제후(衛侯 : 즉 위왕)가 초나라에 갈 적에 대부(大夫) 북궁문자(北宮文子)와 함께 정나라에 예의가 훌륭하다함을 듣고 잠시 예방(禮訪)하였더니 정나라 간공이 인단을 시켜서 비림(斐林)땅에 나아가 영접의 예를 행하여 북궁문자를 맞아들이고 간공이 또 인단을 시켜서 위왕(衛侯)에게 국빈의 예를 다하니 북궁문자가 위왕에게 보고하기를『정나라는 예의지국』이라고 칭찬하였다. ○또 참고하건대 좌씨전 제九권에 있기를 정나라 헌공(獻公) 二년 을축에 진(晋)나라 경공(頃公)이 사망하매 정나라에서 태숙유길(太叔游吉)을 시켜서 조상하고 또 회장(會葬)케 하였는데 진(晉)나라 위서(魏舒) 책망하기를 『대부(大夫)로서 제후(諸侯 : 즉 춘추때의 列國의 君임)의 예를 대행할 수 없는데 더구나 조문과 회장을 겸할 수가 있느냐』하매 유길(游吉)이 답변하기를『옛적에 주(周)나라 천자상(天子喪)에 우리의 선왕(先王)이신 간공(簡公)께서 초나라에 가시고 안 계시므로 우리나라의 선대부(先大夫)이신 인단(印段)이 주나라 천자상에 가셨었으니 인단은 곧 우리 읍(邑)의 작은 벼슬이로되 천자나라의 유사(有司)가 정나라의 잘못을 성토한 바가 없었다』라고 하니 진나라에서 감히 힐책하지 못하였다. ○增註 조선씨족통보를 보면 정(鄭)나라에 목자존호(穆字존칭)를 가진 일곱분이 모두 목공(穆公)의 아들인데 子良의 후손은 良씨가 되고 子游의 후손은 游씨가 되고 子國의 후손은 國씨가 되고 子罕의 후손은 罕씨가 되고 子駟의 후손은 駟씨가 되고 子刃의 후손은 印씨가 되고 子豐의 후손은 豐씨가 되었는데 오직 良씨 國씨 印씨 세 성만 우리나라로 건너와서 조선씨족이 되었다고 하였다.